집필자: 한원택 (광주과학기술원)
백운출 박사님의 회상록을 쓰면서
해림 백운출 박사님과의 인연은 필자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을 때, 1986년 미국 세라믹학회 유리부회의 발표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인으로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들과 한국에서 논문을 발표하러 오신 몇 분의 교수님들을 제외하고는 유리분야로 미국에서 연구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때였다. 광섬유와 관련한 광학유리에 관한 열적, 기계적, 광학적 특성 등을 연구하시던 백운출 박사님을 자연스레 같은 전공자로서 까마득한 후배로서 미국에서 처음 만난 것이다. 유리의 이온교환, 강화현상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석학이셨던 저의 지도교수였던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의 A. R. Cooper교수의 연구업적과 멋진 인간미에 매료되어 늘 뵙기를 소망했다 하시며, 그 당시 한국에는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유리과학을 연구하는 저에게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여주셨다. 그 당시 백운출 박사님께서는 광섬유의 인출과 관련한 연구를 하시면서 인출속도와 유리의 점성, 그리고 광섬유에 남게 되는 잔류응력등의 상호 관계에 대해 서로 많은 기술적 논의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백운출 박사님은 1969년부터 AT&T Bell 연구소에서 연구원과 석좌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광섬유, 레이저와 광통신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결과를 많이 배출한 공적을 인정받아 이미 1986년에 AT&T Bell 연구소의 최고의 명예인 Bell Labs. Fellow라는 칭호를 받은 광학계의 거두가 되어 있었다.
저 또한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PRI공대의 유리과학기술 센터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광섬유의 기계적인 안정성을 위한 기초연구를 진행하였었고, 3년 반이 지난 1991년 7월에 새로 설립된 한국생산기술연구원(KITECH)의 수석연구원으로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몇 달 전에 백운출 박사님 또한 같은 기관의 부원장으로 부임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제가 Glasses and Photonics 랩을 이끌면서 한국에서 최초로 비선형 광학유리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 백운출 박사님은 많은 격려와 기술적 논의로 멘토 역할을 자상하게 해 주셨다. 연구를 논할 때는 정말 엄정함과 정확함으로, 후배로 만날 때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다정하고 농담도 잘하는 멋진 분이셨다. 그 당시 한국에 광섬유, 광통신 연구를 하는 특화된 연구기관이 없다고 많은 고민을 하시더니, 부임 후 3년이 지났을 때 차세대 연구인력을 키워내는 창의적 요람과 첨단 과학기술개발의 산실로 새롭게 탄생한 연구교육기관인 광주과학기술원(GIST)으로 1994년 1월에 홀연히 훌쩍 떠나셨다. 아마 이것이 진정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저도 1998년 12월에 광주과학기술원에 교수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정보통신공학과의 같은 Photonics 그룹에서 저는 기능성 특수 광섬유의 설계와 제조를 맡아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광섬유 연구를 위한 실험용 고가의 장비 일체를 이미 백운출 박사님께서 다 설치하여 운용하고 계셨고, 제가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기에 지체 없이 특수 광섬유 개발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백운출 박사님의 진두지휘로 저 포함한 그룹 교수들과 ERC 과제, 정부과제들과 각종 산학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괄목한 만한 연구실적을 다투어 내게 되었다. 기술의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연구 과제를 만들어 내는 기획력, 과제의 수행을 위해 절차탁마하는 철저함 등 많은 훌륭한 품성을 배우게 된 것도 후학들이 받았던 백운출 박사님의 값진 선물과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개인적으로는 탁월한 과학자이자 멋진 로맨티스트였던 백운출 박사님을 1986년부터 돌아가신 2011년까지 함께 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할 것이다. 학문과 과학의 길이라면 나이와 관계없이 허심탄회하게 동등하게 철저하게 함께 나누고, 인간이 하는 일에는 조물주가 개입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과학하는 일 포함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신념으로 창의적인 일을 선구자적으로 수행하시던 백운출 박사님을 존경의 염으로 회상록을 쓰게 된 것이다.
프롤로그
2011년 5월 3일 광주과학기술원 (GIST)의 제1호 교수이자 광통신계의 석학이자 ‘광주광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던 백운출 박사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처럼 흰구름 속에서 찬란하게 혜성같이 나타나 세계를 한 가족처럼 연결한 세기의 핵심기술인 광통신용 광섬유 기술에서 신성같이 반짝이다 다시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지구별에서의 그의 활동기간은 77년.
백운출 박사는 광섬유가 세계적으로 처음 개발된 1970년부터 광통신 분야의 핵심기술인 광섬유 기술개발에 혁신적인 공헌을 한 세계적인 석학이다. 현재 전 세계의 광섬유를 대량생산하는 제조현장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광섬유 인출 시스템은 백운출 박사가 1981년 세계최초로 연구 개발한 고속 광섬유 인출공법 기술에 의한 것이다. 이 공법에 의한 광섬유의 인출로 광섬유 생산단가를 그 당시 1m당 5cent 이하의 가격까지 파격적으로 내려 생산성 향상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여, 광섬유의 실용화를 한 단계 앞당기는 파급효과를 가져왔고, 광섬유에 의한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장파장대에서 색분산 없이 광전송 특성이 우수한 분산천이 광섬유(Dispersion Shifted Fiber, DSF)를 처음으로 창안하여, 현재 장거리 통신용으로 보편화되어 해저케이블이나 고속 대용량용 광섬유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공로와 업적을 인정받아 백운출 박사는 미국 AT&T Bell 연구소에서 공로상을 비롯하여 논문상, 기술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으며, 1986년에는 AT&T Bell 연구원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직위인 Fellow로 추대되었다. 1998년 2월에는 과학기술자로써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으로써 공학자의 노벨상이라고도 일컫는 미국학술원인 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 (NAE)에 회원으로 추대되고, The Third World Academy of Sciences의 Fellow 및 공학기술 부문 회원심사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깊이 심어주었다.
그는 개인적인 연구 및 교육활동 이외에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부원장 겸 회원심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이어서 한림원 이사로도 봉사하였다. 그 외 정부출연 연구기관 산업기술 연구회의 이사로서, 정부의 연구정책 수립과 국가적인 기술발전을 위해서도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왔다. 백운출 박사는 신설된 광주과학기술원의 제1호 교수로 영입되어 과기원의 특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전략사업의 하나인 광산업을 광주시에 유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여 광주 첨단산업의 뿌리를 내리고 광주시를 광산업의 세계적 중심지로 만들 계획을 수립한 주역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공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 후 국가과학기술 발전의 혁혁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였다.
한국에서의 학창시절과 해군, 그리고 결혼
백운출 박사는 1934년 12월 2일 경상남도 진주시 수정북동 359번지에서 진주와 부산에서 큰 기업체를 경영하던 사업가인 백대현씨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9년에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고등학교 2학년 18세가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낙동강 전투를 필두로 쏟아지는 포격 속에서 진주에 있던 부친의 사업체는 사라졌다. 전쟁 중에서도 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문과 반에서 이과 반으로 전과를 하였고 진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얻었다.
고교 졸업 후 195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을 하였으나, 의식주 문제와 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교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당시의 한국해양대학교는 전시중이라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어 최고의 경쟁률을 보였다. 한국해양대학교 재학시에 기관과를 전공하여 물리, 기계, 소재 등의 기초 공학기술에 토대를 닦았다. 이때의 전공이 훗날 미국으로 유학하여 공부할 때 기계공학과 응용물리를 전공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57년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소위로 임관을 하여 부산에서 진해로 떠나오게 된다. 중위로 진급하던 때에 서울에 있는 해군본부로 발령이 나게 되었고, 이 때 함정국 연구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군함을 타고 바다를 누비는 생활에서 사무실에서 연구를 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맡은 책무는 해군에서 필요한 군사장비 및 관련 원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한번 일을 맡으면 끝장을 보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투철한 백운출 중위는 연구과에서 탁월한 일처리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넘치는 학구열을 숨길 수 없어 몰래 유학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믿을 만한 사람이 한 여자를 소개하였고, 마음에 들자 만난 지 하루 만에 교제를 시작하여 그대로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것이었다. 철두철미 일에는 확실하고 사랑도 성격대로 호방하였다. 아내인 이재학씨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해군장교인 백운출씨가 점잖으면서도 박력이 있고, 유머가 있으며 아는 것이 다방면에 많아 매력이 많았다 한다. 2년여를 교제하고 당시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뒤에 있는 종로예식장에서 1962년 6월 10일 화촉을 밝히게 된다. 결혼을 하자 바로 해군 공창이 있는 진해의 해군기지로 다시 발령이 났고, 그때부터 신혼생활은 시작되었다. 발령이 나면 이사가 잦은 군인 신분이라 살림은 간단하였고 간편 위주로 생활하였다. 신혼생활이 1년이 되어 갈 즈음 또 다시 해군본부로 발령이 났다. 그 때 백운출은 해군 대위였고 조금 있다 제대를 하게 된다.
제대를 하고 나서 미국에 있는 UC Berkeley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제대 전에 이미 입학통지를 받고 있었는데, 제대를 하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지체 없이 떠나게 된 것이었다. 이때가 1963년 9월, 사랑하는 아내를 조국에 남겨 놓고 홀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군인생활을 6년이나 하고 또래 학생들보다 늦게 대학원에 진학하니, 동급생들이 모두 어렸다. 누구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고, 늘 새벽까지 공부하는 게 습관이 될 정도로 매진하였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우수한 성적이 나왔고 기계공학 전공으로 1965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계속해서 같은 대학의 박사과정으로 진학을 하였고, 세부전공을 응용물리학으로 바꿨다. 연구조교로 월급도 받고, 아내가 미국으로 건너와 같이 살게 되어 심신 공히 안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미국 아이들에게 한국 무용을 가르치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가서 한국 무용 발표를 하는 등 보람 있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마침내 인고의 세월을 거쳐 1969년에 “Study of Laminar Incompressible Viscous Flow near the Sharp Trailing Edge”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미국 AT&T Bell 연구소에서의 연구생활과 Bell Fellow
백운출 박사는 1969년 6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귀국할 생각도 많이 하였지만, 새로운 선진기술을 습득한 인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그 당시 한국의 제반 상황 때문에 당분간 미국에 머무르기로 결정한다. California에서 6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동부 New Jersey주 Princeton에 있는 Western Electric Company의 Engineering Research Center에 연구원으로 그 해부터 일하게 된다. 그 당시 Western Electric Company는 AT&T의 부속기관으로 전화기 및 전기통신에 관한 연구를 하는 곳이었는데, 후일 Bell Laboratories와 합쳐지고 결국에는 AT&T Bell Lab. 으로 통합된다. 백운출 박사는 1969년부터 1991년 귀국할 때까지 22년간 AT&T Bell 연구소에서 연구원과 석좌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광섬유, 레이저와 광통신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결과를 많이 배출한 공적을 인정받아, 백운출 박사는 1986년 AT&T Bell 연구소의 연구원으로는 최고의 명예인 Bell Labs. Fellow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1969년부터 AT&T Bell 연구소의 연구원으로서의 연구활동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주로 레이저와 물질간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연구를 수행하여 레이저와 재료간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에 대한 해석적 이의 토대를 만들었다.
아래에 수행하였던 많은 연구업적 중 기술적으로 혁신을 이루었던 중요 연구내용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하였다.
1971년 6월에 "IEEE/OSA Laser Engineering and Application" 학술대회에서 “고강도의 레이저빔을 물질에 조사했을 때 표면에서의 에너지 농축에 의한 부분적이고 선별적인 물질제거의 가능성”을 발표하였으며, 1973년 "IEEE/OSA Laser Engineering and Application" 학술대회에서 고속촬영으로 관찰할 수 있음을 발표하였다. 또한 1971년부터 1972년까지의 연구기간 동안 레이저를 이용한 천공과 연삭 기법에 대한 연구결과를 수차에 걸쳐 발표하여 레이저를 이용한 초정밀 가공기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1972년에는 국제 학술지 “Optics Communications”에 실리카 유전체 도파관의 주기적인 모드분산에 대해 해석하고 광대역 필터와 Phase-Matching 소자를 실제에 응용하는 방법을 발표하였는데, 이 공법의 개발로 광섬유내의 Coherency를 증가시켜 현재 광통신의 핵심기술인 Multiplexing에 필수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1974년에는 CO2 레이저를 이용하여 실리카 유리 광섬유의 인출에 대한 연구결과와 광섬유 내에 유도된 스트레스에 의한 효과를 ‘Applied Physics’에 발표하였고, 이후 C. R. Kurkjian박사와 공동으로 광섬유의 인장강도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에 대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1974년에서 1979년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미국화학회 응용물리학회, 유리물질에 대한 국제회의 등 4개의 국제 학회 및 학술지에 광섬유 코팅과 처리기술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고, 1981년 IOOC"81 학술대회에서 광섬유의 코팅을 안정화하는 광학적 기술을 발표하였다. 또한 동년에 이 기술을 발전시킨 광섬유의 고강도와 저손실을 보장하는 ‘초고속 광섬유 인출과 코팅’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광통신 기술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있다는 AT&T Bell 연구소에서 이와 관련한 기초 및 응용 연구를 핵심적으로 수행해 왔던 백운출 박사는 광통신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으로 조만간 광통신이 전기통신을 대체할 것이라는 사실을 통감하고 있었다. 때 마침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초청세미나에 백운출 박사를 초빙하게 되고 1977년에 잠시 한국 출장길에 나서게 된다. 당시 KIST의 정만영 부소장이 국내는 물론 국외의 광통신 전문가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대기업의 중역과 반도체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유망기술인 광섬유 기술에 대한 투자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 세미나에서 백운출 박사는 세계의 새로운 기술동향으로 광통신이 급진적으로 부각되고 있음을 설득하고 인식시켰다. 그리고 급선무인 광섬유의 개발 및 상품화를 위해서는 광케이블 공장을 속히 지어야 하나 기존의 케이블 회사의 인력과 기술로 광섬유 제조가 어려우니, KIST가 개발을 주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논지였다.
이듬해인 1978년 KIST에 금성전선(이후 LG전선이 됨)과 대한전선이 공동 투자하여 개발에 착수한 것이 한국 광섬유 제조의 효시가 된다. 이때 KIST에서 연구를 진행한 주역이 최상삼 박사이었고, 당시 광섬유의 광손실 특성을 1dB/km 미만으로 개선하여 한국전력 부산지점에서 토성동 변전소까지 케이블을 가설하는 데 성공한다. 광섬유 개발은 1982년 대한전선, 금성전선, KIST가 공동 투자한 한국광통신주식회사가 광섬유 생산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국산화 단계를 밟게 된다. 이후 백운출 박사는 금성전선, 대한전선, 삼성전자, 대우통신에게 기술지도를 통하여, 1983년과 1984년 상기 4사가 기술선진국으로부터 광통신기술을 무리 없이 조기에 도입하는데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금성전선과 AT&T, 대한전선과 스미토모, 삼성전자와 ITT, 대우통신과 노던텔레콤 등으로 서로 기술을 제휴한 4개 회사가 국내에서 탄생함으로써 광섬유는 물론 광수동소자, 증폭기, 광부품에 대한 경쟁적인 개발이 계속됐다.
1984년에는 AlChE Symposium Series에, 실리카 광섬유 인출과 코팅의 열전달 측면에서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으며, 1985년에는 OFC/OFS"85 국제학술대회에서 계층적인 구조를 가진 굴절계수가 다중모드 전달특성에 미치는 효과를 발표하였다.
한편, 수학기법을 이용한 시뮬레이션 연구도 함께 수행하였는데, 1980년에 세계최초로 수학적 기법을 이용하여 광섬유의 전송특성을 해석하여 ‘분산천이 단일모드 광섬유’를 설계하였고, 그 결과 1982년 6월에 벨시스템 기술전문학술지의 “물리학과 소자분야의 81년도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에는 ‘임의의 굴절계수 분포를 가지는 단일모드 광섬유’를 개발하여 미국특허(No. 4,412,722)를 취득하였고, 이 기술의 개발로 광섬유와 광섬유간, 광섬유와 부품간의 접속 시 접속손실을 최저화하여 장파장에서 단일모드 광섬유의 실용화가 가능하게 되어, 광통신 본격화의 기틀을 이루었다.
1986년에 고강도 광섬유 제작용 지르코니아 전기로의 새로운 설계방법을 개발하여 J. of Lightwave Technology에 발표하였는데, 이 기술을 적용하여 광섬유를 인출한 결과 광섬유의 생산단가를 m당 5cent 이하로 떨어뜨리는 개가를 올렸다. 이 결과 비로소 광섬유의 실용화가 이루어졌고, 광섬유에 의한 초고속 정보통신망의 구축이 가능해졌으며 이 공법은 현재 광섬유 제작시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최신공법이 되었다.
광섬유의 고속 인출과 관련한 좀 더 구체적인 기술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개발 초창기의 광섬유 제조공정은 생산단가가 너무 높아 실용화에 걸림돌이 되었다. 종래의 통신용 구리선(Copper wire)과 가격 경쟁을 할 수 있는 혁신적인 광섬유 양산기술이 개발되어야만 광통신망 구축에 필요한 막대한 수요의 광섬유를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저렴한 광섬유의 제조를 위해서는 광섬유의 인출속도를 올려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당시 광섬유 인출 장비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개의 장비가 합쳐진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인출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각 부문의 장비가 동기적 작동을 하는 것이 선결 요건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한 새로운 시스템을 백운출 박사는 개발하였고, 초당 1~2 m 정도의 저속으로 인출되던 것을 초당 10 m이상으로 향상시켜 생산성을 제고하였다. 이 고속 인출 기술 시스템은 (1) 고온용 유도 전기로의 개발, (2) 광섬유의 냉각현상을 해석하여 인출속도와 냉각속도와의 함수관계를 정립한 것, (3) 광섬유 표면에 Polymer Coating을 피복하는 특수 Coating Applicator 를 고안하여 고속 인출 시에 Polymer 물질에 의한 광섬유 표면상의 마찰현상을 최소화하여 광섬유 강도를 향상시킨 것, (4) 광섬유 표면에 고속으로 피복되는 액체상태의 Polymer를 UV Lamp 장치로 고체화시키는 공정 개발 등 4가지 핵심기술이 완성되어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이 모두 백운출 박사의 주도적인 연구와 AT&T Bell 연구소의 동료들의 협동연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계속적인 연구로 이 네 가지의 상이한 공정이 고속인출의 속도에 관계없이 동기적 제어를 성공시킨 결과 초당 20m이상의 생산성이 가능해 졌고 광섬유의 원가를 m당 10cent 이하로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단계로 광섬유의 생산가를 m당 10cent에서 다시 5cent이하로 낮추기 위해서는 광섬유 모재를 대형화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특수 고온 전기로가 부착된 Over-jacketing용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대형모재의 제조기술은 최첨단 기술로 외국에서의 기술 도입은 상상치도 못하며, 결국은 자체개발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서 백운출 박사의 주도로 결국 성공하게 되었다.
또 백운출 박사는 1988년에 고온에서의 실리카 유리의 점성을 측정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현재 유일한 방법으로 알려진 기술을 개발하였다. 실리카 유리는 그 점성의 변화가 14000C에서 시작해서 23000C 까지 일어나고, 특히 23000C에서 거의 액체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고온상태에서 정확한 점성을 측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다름 아닌 광섬유의 인출방법을 사용해서 측정하는 것이었다.
상기한 미국 AT&T Bell 연구소에 재직하면서 수행했던 많은 연구업적들로 세계의 과학기술계에서 인정을 받아 많은 학술대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와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1979년 미국요업학회의 가을 학술대회에서는 좌장을,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광섬유 통신 (Optical Fiber Communications, OFC) 학회의 논문심사위원직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부터 1990년까지는 미국세라믹학회의 편집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에는 미국 AT&T Bell 연구소의 Bell Labs. Fellow으로 선임되어 한국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당시 AT&T Bell 연구소 내에서도 Fellow가 20명밖에 안되는 공학자로의 최고 영광인 자리에 뽑혀 한국으로써의 자긍심을 만방에 떨쳤다 할 수 있다. AT&T Bell 연구소에 가서 백운출 박사의 큰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되면 자랑스럽고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하다. 1986년과 1987년, 1989년에는 OFC 학회의 좌장, 1988년에는 전자부품(Electronic Components)학술대회 좌장, 1988년부터 1984년까지는 Princeton Chapter of Sigma Xi Society의 집행위원직을, 1988년부터 1989년까지는 IEEE Electronic Components Conference 섬유광학분과 위원회 위원장직을, 1989년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전자부품과 재료 국제학술대회’에서 공동의장직을, 1989년 4월에는 미국 세라믹학회(American Ceramic Society)의 Fellow으로 선임되었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는 동 학술대회의 운영위원으로 활약 하였다. 1990년에 전자부품기술(Electronic Components and Technology) 학회의 좌장과 OSA 정기학술대회의 좌장을 맡아 수고하였다.
22년간 봉직한 AT&T Bell Labs. 에서의 학문적 업적과 명예를 뒤로 하고, 백운출 박사는 그동안의 경륜을 펼쳐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에 여생을 바치고자 1991년에 귀국하게 된다. 그가 개발한 광섬유 초고속 인출기술의 혁명적인 성과를 기려 동료 L. Blyler 박사는 다음과 같은 헌시를 백운출 박사께 바치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보낸다.
We’ll drink a toast or two, by heck,
In tribute to ole Quick Draw Paek,
When fiber drawing weren’t so clear,
It needed most a pioneer
Now it’s a science, thanks be to Un-Chul.
His contributions were substantial.
The drawing process meant to him
Transport of heat, mass and momentum.
He got started on the right foot
By consulting Bird, Stewart and Lightfoot.
And furthermore he had the gall
To build a drawing tower tall.
To coat the fiber fast, you see,
It must be cooled convectively.
And then he showed the fiber strength
Was independent of their length.
And that the stress it takes to break’em,
Depends not on how fast you make’em.
So he drew them fast and strong with ease,
Well before the Japanese.
이후 한국에 귀국하여서도 계속하여, 백운출 교수는 세계 과학기술계의 각종 학회 및 학술대회에서 다수 직책을 맡아 수행한 바 있다. 상기한 다양한 활동 외에도, New York Academy Sciences, Sigma Xi, SPIE, IEEE, 한국광학회 등의 각종 학회활동도 활발하게 하였으며, 1991년에 반도체 소자 심포지엄, 광부품 워크샵, 일본에서 개최된 IEMT의 좌장, 1992년에는 OECC"92의 운영위원으로,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광학회 이사로서, 1992년부터 1994년까지는 동학회의 광자공학분과 위원장으로서, 1993년에는 제 6회 수송현상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의 좌장으로서, 1994년부터 1997년까지는 동학회의 부회장으로서 한국광학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95년에는 홍콩에서 열린 IOOC"95의 좌장을 역임하였으며, 동년 일본에서 열린 CLEO/Pacific Rim"95의 좌장으로, CLEO/Pacific Rim"95의 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OECC의 국제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많은 국제학회에서 종횡무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92년 5월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광학회 (Optical Society of America)의 Fellow으로 선임되었으며, 1996년에는 OFC의 Tyndall Award 선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특이 사항으로는, 1995년에 국제 광통신 학술회의인 OECC"97을 한국으로 유치하였으며, 동회의의 조직위원장으로서 OECC"97을 ‘97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개최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유치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렸웠던 일이라, 백운출교수의 학문적, 인적 네트워크의 수월성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이 학회에는 전 세계에서 7백여명의 과학자들이 참석하였으며, 동시에 서울 COEX에서 광통신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전시회에는 세계의 80여개 회사에서 광통신관련 소재, 부품, 시스템등을 전시하여 수천명이 참관하였다. 이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7월에 OECC 국제자문위원회 공동의장으로 임명되었다.
OECC"97의 성공적인 개최의 숨은 또 다른 주역은 사무총장으로 모든 프로그램 및 행정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였던 같은 정보통신공학과의 이용탁 교수를 들 수 있다. 이 유래 없던 국제학회를 위해 삼성전자, LG전자, 대한전선은 각각 1억원씩 찬조금을 출연하여 산학협동의 좋은 사례로 찬사를 받았으며, OECC"97 국제학회 사무국에서는 재정적으로도 흑자 경영을 하며 성공리에 마쳤다. 국제학회가 끝난 후 정산한 결과 남은 예산 중 1억 5천만원을 백운출 박사께서 강하게 지시하여 원래 출연했던 각 3사에게 5천만원 씩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찬조금의 일부를 다시 돌려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출연금을 내도록 결정한 회사 중역들을 오히려 당황하게 한 일화는 아직도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한편 한국광학회에게도 8천만원을 기부하여 열악한 국내학회의 재정의 안정에도 일조하였다. 이 또한 백운출 박사의 통 큰 마음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또한, 백운출 박사는 전문학술지에서도 학자로서의 봉사활동도 꾸준히 활약을 전개하였는데,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세라믹 학회의 편집교정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1995년 5월부터“비결정질 고체 (J. of Non-Crystalline Solids)"의 편집위원회 위원으로서, 이외에도 "J. of Applied Physics", "J. of Lightwave Technology“, ”Electronics Letters", "Applied Physics Letters“, ”J. of Heat Transfer", "Glass Technology“, ”J. of American Ceramic Society", "Ceramic Bulletin“, ”Photonics Technology Letters", "Optical and Quantum Electronics“, ”Optics Letters" 등 세계유수 학술지의 논문 심사위원으로서 광통신을 포함한 광자기술 전반에 걸쳐 공정한 심사와 후학들의 연구진작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국에서의 연구와 교육생활, 미국학술원 (NAE) 회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광주과학기술원
1991년 미국에서의 학문적 업적과 명예를 뒤로 하고, 백운출 박사는 그동안의 학문적, 기술적 경륜을 펼쳐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에 여생을 바치고자 결단하고 귀국하였다. 생산기술 개발 및 실용화 지원을 통해 글로벌 중소·중견기업을 육성함으로써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시대적 명제를 안고 1989년 설립된 한국생산기술연구원 (KITECH)의 초기 부원장으로서 1991년에 부임을 하게 된다. 그 당시 과학기술처 산하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순수 기초 공학교육을 담당한 연구교육기관이었다면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상공부 산하의 연구교육기관으로 응용과학기술의 개발에 그 초점을 맞추어 설립된 기관이었다.
1993년에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의 석좌교수로서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의 바른 수립을 위하여 선진국에서의 오랜 경륜과 지식을 바탕으로 헌신의 노력을 하였으며, 1991년부터 1995년까지는 포항공과대학교의 가속기 자문위원으로서 국내 최초로 제작된 방사선 광가속기를 이용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92년에는 통상산업부 전자산업 발전심의회 위원과 우주항공산업 발전심의회 위원 및 한국도로공사 정보통신산업부 자문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의 국제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아울러 G7 과제인 “HDTV"와 ”첨단생산시스템“의 대형프로젝트를 맡아서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부원장으로의 행정가 임무를 완수한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본업인 연구와 후학양성을 위해 대학교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용단을 내리게 된다. 세계수준의 과학기술 교육과 첨단과학기술개발을 위하여 설립된 광주과학기술원의 제 1호 교수로 1994년 1월에 정보통신공학과의 정교수로 영입되어, 교학처장을 역임하고 학과장의 보직을 맡아 선진국에서의 갈고 닦은 연구 경륜과 선진 시스템 및 체제를 도입하였다. 광섬유와 광통신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후학의 양성과 세계 수준의 교육 및 연구기관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수준 높은 연구결과가 속속 해외 저명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수많은 국제 저명저널에 많은 논문이 게재되는 등 괄목할만한 연구실적 등으로 초기의 인지도가 약했던 광주과학기술원이 해외에 먼저 알려지고 초일류 대학원으로 급성장하게 되는데 크게 일조를 하였다.
백운출 박사는 정보통신공학과를 설계함에 있어 수월성과 차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포토닉스 그룹, 반도체 그룹과 유무선 네트워크 그룹으로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유기적으로 협력 체제를 갖추도록 기틀을 잡았다. 이와 함께 개별교수들이 선호하는 장비를 먼저 구비해서는 경쟁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과내 교수들을 설득하여 공동연구가 가능한 대형장비를 우선적으로 구입하여 실험실을 정비하였다. 이 결과 광섬유 모재 제조설비인 MCVD (Modified Chemical Vapor Deposition) 2대, 광섬유 모재로부터 고온에서 광섬유를 인출할 수 있는 Drawing Tower, 광섬유 모재 굴절률 측정장치, 광특성 측정 장치등을 구비하여 광섬유를 설계에서부터 최종 제조까지 가능케 한 시설로서 대학교 시설로는 세계에서 5번째에 들 정도로 완비케 하였다. 한편 반도체 공정시설로는 크린룸 시설을 필두로, 반도체 증착장비인 MBE, MOCVD, PECVD, 에칭장비로 RIE, ICP, 반도체 Fab.에 필요한 Sputter, Evaporator, Furnace 등을 설치해 LD 및 LED 소자, Microwave 소자등의 개발에 한 치의 오차가 없도록 구비하였다. 이는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 중 하나인 미국 AT&T Bell 연구소의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실제 22년간 근무하면서 체득하고 배워 온 것을 과감하게 한국에서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이후 이러한 연구 시스템을 통해 광주과학기술원의 정보통신공학과가 발전한 내용과 그 실적을 보면 그 혜안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후 정보통신공학과는 발전을 거듭하여 통신시스템 및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그룹, 포토닉스 및 광학 연구그룹, 반도체 광전자 및 초고주파 전자공학 연구그룹, 계산수학 연구그룹 등의 세부그룹으로 분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운출 박사는 광섬유공학과 공업수학 두 과목을 강의하였는데 해박한 이론으로 무장한 지식과 실제 연구에의 응용을 중점으로 한 과목들이었고, 그 명성으로 많은 대학원생들이 다투어 수강하였다. 강의할 때는 반드시 하얀 가운의 실험복을 착용하여 학문하는 자세의 진지함이 강의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었고, 멀리서도 흰 가운의 교수는 백운출 박사임을 학과에 있는 모든 이는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 퇴직한 후 석좌교수로서 봉직할 때도 강의만은 다른 교수들에게 맡기지 않았고, 열정에 찬 명 강의는 졸업생들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특히 결강 한번 하지 않고 강의에 철저했던 것은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학생들을 사랑으로 지도하는 교육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모든 대학원 강의를 광주과학기술원 개원 초기부터 영어로 하도록 추진하여 학생들의 학문적인 소양과 국제적인 안목을 키우는데 큰 기여를 한 바 있다.
1994년부터는 삼성전자(주)와 산학연 협동연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정보통신기술 지도 및 광통신 핵심기술 자체개발을 선도하였다. 특히, 광섬유 인출기술 개발의 지원을 통하여 광섬유 인출속도를 240% 향상시킴으로써, 광섬유 제작기술을 발전시키고 생산단가를 떨어뜨려 국제시장에서의 원가경쟁력을 높임으로써 동회사의 광섬유 케이블 수출실적이 1994년 1,200만불 1995년 2,300만불에 이르는 성과를 이루는데 크게 일익을 담당하였다. 1994년에는 또한 국내최초로 광증폭기를 제작하는 기술적 쾌거를 이루었고, 광소자의 응용을 위해 비선형 유기재료의 연구와 편광 Er-doped 광섬유 증폭기의 제작도 수행하였다.
1995년 3월에는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C. Towns와 A. Hewish를 비롯한 저명한 과학자를 초청하여 세미나와 방송매체에서의 대담을 통해 국내에 세계의 과학기술연구 동향과 과학자의 사명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UC Berkeley대학과 Rutgers 대학 그리고 Bell 연구소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대학과 연구소와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세계 일류대학으로 웅비하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등 광주과학기술원의 초기 시스템 구축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또한, 1995년에는 Optical and Quantum Electronics 특별호, “한국의 광전자학,Vol.27 (5)"의 초청편집자로‘한국의 광부품 및 소자기술의 현황’에 대한 초청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의 광통신 부품 및 소자, 미세광학, 광집적, 광센서 등을 중심으로, 현재 국가사업으로 진행되고있는 연구, 개발 및 실용화 등을 다루면서, 통신개발에 관한 국가계획을 3단계로 나누어서 한국의 통신개발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1995년 8월에는 국제학술지인 “광자 및 양전자학(Optical and Quantum Electronics)”의 편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됨으로써 광주과학기술원의 설립 초기부터 저명한 국제학회와 공조체제를 이루어 초창기에 필요한 견고한 Technology Network을 구축하는 등 혁혁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1995년 9월에는 광통신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광학 기술의 산업화에 미친 그간의 공적들을 높이 평가받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종신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공학부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96년에는 과학기술처의 포항가속기 연구소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와 함께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의 이사로도 임명되었다.
1997년 6월에는 광주과학기술원 정보통신공학과 내의 초고속광네트워크연구센터(Research Center for Ultra-Fast Fiber-Optic Networks: UFON)가 한국과학재단지정 우수연구센터(ERC)로 선정되어 9년간 지원을 받으며 2000년 2월까지 연구소장으로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당시 광통신 관련한 기술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광통신기술이 발전해오면서 그 전달 매체인 광섬유의 종류와 기능이 통신방식, 즉 광원의 파장 및 채널 수, 전송속도, 전송거리 등에 따라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있었다. 또한 광섬유가 단순히 광신호의 전송매체의 기능뿐만 아니라 광섬유 증폭기, 광섬유 격자,분산 감쇠기 등 광소자 및 sub-system으로까지 그 기능이 확대되고 있었다. 광섬유 증폭기는 그 당시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던 파장분할방식의 전송시스템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와 함께 이득 대역폭을 증가시키고 이득 파장 대역을 기존의 광통신 파장인 1.5 마이크론 대역 외로 옮기려는 노력이 미국의 Lucent과 Corning 그리고 일본의 NTT 등에서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광섬유 격자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수동소자의 개발 가능성 때문에 수동소자로서 요구되는 특성인 채널간의 Low Cross Talk, High Isolation, Temperature Insensitivity를 만족하기 위한 용도별 특수 감광 광섬유를 설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편 초고속 장거리 통신을 위해서는 기존의 광섬유가 갖는 색 분산을 상쇄해주는 분산 보상기용 광섬유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위해 광섬유의 기하구조와 재료를 최적화한 분산 보상용 광섬유의 개발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나 보다 완벽한 분산보상을 위한 가변적 분산 보상,분산기울기 보상 등의 여러 기능이 추가로 요구되어 이를 위한 기술개발이 왕성하게 광통신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눈부신 광통신 기술의 발전은 저손실 광섬유가 출현한 1970년을 시점으로 연구개발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1980년 광통신이 실용화됨으로 그 성능의 우수성과 경제성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특히,장거리 전송 시스템 실험에서 보여준 Terabit 광전송 실험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장을 여는 중요한 기술적 혁신으로서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데, 이는 전자통신의 한계를 벗어나 광통신에서만 가능한 영역인 Terabit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Voice, Data, 유무선 방송망,무선가입자망 등이 모두 통합된 광대역 종합통신망의 구축을 위해 그 Backbone으로서의 초고속 광네트워크의 조속한 실현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백운출교수를 필두로 한 광주과학기술원의 정보통신공학과에서는 초고속 광정보통신망과 관련된 핵심기술의 연구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연구 집단을 형성하여 관련연구를 수행해 오던 중 한국과학재단의 우수연구센터 지원 프로그램으로 초고속광네트워크 연구센터(UFON)가 선정되어 1997년 6월초부터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광주과학기술원의 초고속광네트워크연구센터(UFON)는 (1) 광섬유의 설계 및 제조, 기능성 광섬유 소자, 평면 광집적 회로등을 연구하는 광섬유 및 광회로소자 그룹, (2) 광기반 광대역 광가입자망 구조,유/무선 통합 가입자망 시스템 개발,광대역 가입자망 접속 기술 개발 등에 대한 연구와 개발을 하는 광대역 Access망 그룹, (3) 광ATM 스위치 구조 및 방식, 공간-파장분할 스위치 기술개발등을 연구하는 광스위칭 그룹, (4) Femto초 펄스생성 및 전송기술, 초고속 전광논리 소자개발, 초고주파 광전 정합기술 등에 대한 연구를 하는 Femto초 광전기술 그룹 등 4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각의 연구그룹에 속해 있는 12개의 세부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광주과학기술원과 외부 5개 대학의 20명의 교수와 78명의 대학원생들이 연구책임자와 연구원으로 참여하여 과제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광학과 기술, July 1998에서 부분 발췌 및 편집)
정보통신공학과의 백운출 박사가 Head로 있었던 광자기술 (Photonics) 그룹에는 광섬유 기술 분야에는 한원택 박사, 광학 및 레이저기술 분야에는 정영주 박사, 광섬유격자 및 광 디바이스 기술에는 이병하 박사, 광도파로 이론에는 송계휴 박사, 비선형광학 및 광 측정기술에는 김덕영 박사, 광증폭기 기술에는 오경환 박사 등 세계적인 박사들이 교수로서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초고속광네트워크 연구센터 (UFON)의 광자기술 분야를 탁월하게 수행하였고, 이후 산학연 공동연구에도 적극 참여하고 학계에서 각자 맡은 분야에서 훌륭하게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국제학술대회에서의 논문발표 활동과 국제저널의 논문게재, 특허출원 등으로 세계의 광통신학계 및 연구, 산업계는 광주과학기술원의 수준 높은 광자기술을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 후 대한민국의 광통신을 이용한 인터넷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2015년 현재까지 광자기술 그룹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세계유수의 저널에 게재한 SCI 논문은 도합 6백편이 넘으며, 국내외 학회에 발표한 논문은 3천편이 넘는 놀라운 실적을 달성하고 있다.
1998년 2월에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학술원 (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 U.S.A)에서 백운출 박사의 일생동안에 이룬 연구업적과 공로를 인정하여 정회원으로 추대했다. 미국 학술원 회원이 되는 것은 공학자로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며 그 회원의 선출은 세계 정상급의 석학 중에서 엄선하여 임명하는데 ,그 NAE의 회원이 된 것이다. 한국인으로써는 이런 상을 받은 사람이 5명밖에 없었다.
1998년 3월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부원장으로 9월에는 회원 심사위원회 위원장으로 겸임되었고, 동년 4월 20일에서 6월 27일까지 정부의 과학기술 경쟁력강화 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받아 국가 연구개발 체계를 재정립하고 과학기술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기구 정비 및 기본법 제정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였다.
1998년 5월말에는 삼성전자와 3년간 공동개발 계약으로 27억원의 연구비를 받아 광섬유용 대형모재 제조공법 개발을 성공리에 완수하여 세계 최초로 360Km의 광섬유를 생산할 수 있는 모재를 제조하는 장비와 기술을 이전하여, 산학 공동연구의 큰 결실을 맺었다. 이 기술개발로 삼성전자는 기존의 공법 대비 생산성 향상이 약 90%, 원가절감이 30% (연간 192억원) 달성되어 가격경쟁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백운출 박사는 이 대구경 광섬유 모재 개발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1998년 말에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 기술상 금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광자결정광섬유 개발, Ultra low loss 광섬유 제조를 위한 불순물 제거 연구 등 지속적으로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1999년 2월에는 Third World Academy of Science 회원으로 임명(TWAS)되었고, Institute of Electrical Engineers의 Fellow로도 임명되었다.
1999년에, 백운출 박사는 산업구조가 취약한 광주광역시에 지역활성화 사업의 일환인 국가 전략사업으로 광산업을 유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그 결과 2002년 6월 26일에는 광주과학기술원의 정보통신공학과가 광주 광산업의 발상지라는“Photonics 2010, Gwangju creating light: 이곳 초고속 광네트워크 연구센터는 광주지역 광산업 육성 및 집적화 사업의 발상지로 광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로 각인된 기념패가 건물에 붙여지는 영광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백운출 박사의 집요한 설득과 추천으로, 청주에 있던 LG 이노텍이 광주로 이전하고 크게 발전하게 된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일화도 있다. 2010년 4월 13일자 전자신문에는 광주 광산업 10년을 맞이하여 “산.학.연.관.정 혼연일체로 일군 결실” 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광산업은 중앙정부와 광주지역 산·학·연·관·정이 혼연일체가 돼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1∼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정부의 승인을 거쳐 예산을 지원받기까지 수많은 관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이 뒤따랐다. 광산업 육성 주역으로 당시 정계에서는 대표적으로 박광태 의원을 손꼽을 수 있다. 국회 산업자원위원장이던 그는 정치권에서 광산업에 대한 정부의 사업승인과 예산지원을 뒷받침하고 온갖 반대논리에 대한 ‘바람막이’를 자처했다. 특히 수시로 광주시 실무자들로부터 광산업에 대한 진행사항을 청취한 뒤 직접 국회와 중앙부처를 뛰어다니며 광산업 육성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이뤄지는 데 기여했다. 광산업계에서는 박 의원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다면 광주 광산업의 태동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을 정도다. 중앙 정부부처에서는 당시 박태영 산자부 장관과 김재현 산자부 생활산업국장도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은 광주시의 주장에 귀 기울이며 정부 차원에서 기획 및 후원을 이끌었다. (중략 ) 광주지역 대학교수들의 역할도 매우 컸다. 백운출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정보통신공학과)는 광산업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광산업 프로젝트 기획에 도움을 줬다. 같은 대학 이선규(기전공학과)·송종인·박창수·한원택·이용탁 교수(이상 정보통신공학과) 들도 광산업 개념과 육성 의미를 정리해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는 데 기여했다. (중략 ) (2010년 4월 13일자 전자신문 발췌)
1999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백운출 박사는 한국과학기술 산업기술연구회 이사로 활동하였고, 동년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 Third World Academy of Sciences, Membership Committee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2월에 정보통신공학과의 교수로 은퇴하였고, 계속해서 석좌교수로 재직을 하였다. 2000년 5월부터 2004년 4월까지 삼성전자와의 공동연구를 수행하여 전량수입에 의존해 온 광섬유 재료를 혁신적인 Sol-Gel공법을 개발하여 광섬유 생산 재료비를 절감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외에도 “금속코팅 광섬유”, “분산평탄 광섬유”, “다중모드 광섬유”등 여러 가지 과제를 공동수행함으로써 기초기술 및 핵심기술 확보에 힘써 많은 특허를 출원 및 등록하였다. 계속하여 2001년 3월부터 2004년 3월까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2002년 11월 미국광학회의 최고 학술지인 “Optics Letters"의 Topical Editor로 선임되어 편집인으로 활약하였다.
2000년 3월부터 석좌교수를 6년 동안 봉직하며 강의와 산학 연구에도 은퇴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게 충실히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석좌교수의 직임도 끝난 후에도 연구에의 정열을 식지 않았다. 계속해서 명예교수 직함을 가지고서도 연구원 자격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국제학회에 참석차 2006년도에 미국으로 떠난 후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2008년도 3월에 귀국하여 친정인 광주과학기술원의 정보통신공학과의 208호실에 다시 자리를 잡게 된다. 책과 저널을 손에서 놓으면 할 일이 없다고 농담을 자주하셨고, 끝없는 노익장을 후배 교수들에게 과시하곤 했다. 백운출 박사처럼 시간관념에 철저한 분은 없을 정도로 매사에 정확해야 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미팅에 5분정도라도 늦게 오게 되면 회의 분위기가 달라질 정도로 엄격하셨다. 이렇게 원리 원칙에 철두철미한 분이였기에 당신이 직접 수행하셨던 연구에서는 오죽 하셨겠나 생각된다. 원하는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절차탁마하는 집념이 연구자로서의 탁월한 업적을 그렇게 많이 쌓은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자기와의 싸움에서도 놀랍게 절제와 끈기의 미덕을 놓치지 않고 말이다.
백운출 박사는 광자기술 그룹 소속의 석박사도 많이 배출하였다. 국내외 대학교의 교수들로, 정부출연 연구소의 핵심 연구원들로, 기업 연구소의 중견 연구원들로 250명 이상의 졸업생들이 활발하게 성공적으로 연구개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백운출 박사는 한국광학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2009년도에 1억원의 기금을 내 놓았고, 한국광학회는 그의 호를 빌려 ‘해림 광자공학상’을 만들어 후학들에게 상을 주어 격려 치하하고 있다. 한국광학회는 최근 5년간 광자공학 분야에서 창의성 있는 우수 논문을 학회지인 한국광학회지와 국내·외 SCI 등재 학술지에 게재하는 등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정회원을 대상으로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에필로그
2011년 5월 3일, 그날도 백운출 박사는 여느 때처럼 아내와 함께 6시에 교정을 두 바퀴 산책함으로써 하루를 열었다. 20년을 한결 같이 오르내렸던 연구실 정보통신공학과 A동 2층에 위치한 208호실에 도착해 유고가 된 저서 “Silica Optical Fiber Technology for Devices and Components: Design, Fabrication, and International Standards”를 다시 한번 퇴고하였다. 50여년 끝없이 갈고 닦았던 연구수행의 결과가 수없이 많이 발표하였던 연구논문들과 특허들, 그리고 이를 기리는 각종 상으로 남았는데, 한편 후학들을 위한 한권의 책으로 광섬유 기술을 매듭짓는 것이 진정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한 과학자로서의 인생이 한권으로 축약된 듯 마무리 되는 것 같아 가슴 한 구석에 허망함이 들기도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늘 그랬듯이 정성껏 마련한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교정 내에 위치한 보금자리인 국제관 아파트로 걸음을 옮겼다. 사거리를 건너면 바로 집인데 2층에서 내려다 보는 아내의 놀란 표정을 뒤로 하고 백운출 박사는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사랑하는 아내 이재학이 보였고, 사랑하는 딸 예쁜 오드리와 듬직한 미국인 사위가 보였고, 미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얼굴들이 보였고, 같은 학과에서 동고동락했던 후배 교수들, 그리고 자랑스런 제자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이렇게 세계적인 광통신계의 석학이고 광주과학기술원 (GIST)의 제1호 교수이자 한국 광주광산업의 아버지 백운출 박사는 해외저명 SCI 저널에 158편의 논문과 국내외 학술대회에 총 418편의 논문, 국내외 특허 등록 59건 및 한권의 유고 저술 등을 남기고 세계의 광통신 기술과학사에 걸출한 한 획을 긋고 사라졌다.
해림 백운출. 광주과학기술원의 정보통신공학과의 강연장은 그의 호를 따서 해림홀로 명명되었다. 동년 8월 25일, 고 백운출 교수의 유가족이 장학금 2억원을 광주과학기술원에 쾌척했다. 광주과학기술원은 이 출연금으로 ‘백운출 장학기금’을 조성해 매년 정보통신공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흰구름 속에서 찬란하게 혜성같이 나타나 세계를 한 가족처럼 광케이블로 연결한 세기의 핵심기술인 광통신용 광섬유 기술에서 77년 간 신성같이 반짝이다 다시 하늘나라로 영원히 여행을 떠난 백운출 박사가 새삼 그립다.
Summary of Significant Professional Contributions by Dr. Un-Chul Paek
Laser/Matter Interaction
Paek’s early work set the stage for analytical understanding of the mechanisms of laser interaction with materials, especially ceramics and glass. A paper (w/Dabby) first predicted the possibility of subsurface explosions in materials irradiated with high-intensity laser beams. Later, this was observed with the aid of high-speed photography. Similarly, Paek analyzed laser drilling and scribing processes which laid the groundwork for modem production techniques using lasers. During this time, Paek also investigated the drawing of silica optical fibers using CO2 lasers, and analyzed the mode dispersion of periodic dielectric waveguides to apply for the design of band pass filters and phase-matching devices.
Optical Fiber Technologies and Photonics Applications
Optical communication, high speed opto-electronics applications, quantum electronics, thin/thick film technology, optical materials, laser light scattering by particles. During his investigation of CO2 laser fiber drawing, Paek observed the effect of the induced stresses in the fiber. This led to a long-term investigation of the factors influencing the strength of optical fibers with Kurkjian and the strength of fusion splices (w/Krause, Kurkjian). Concomitant with this work was the development of optical fiber coating materials and processes and optical techniques to cure these coatings. This work led to the first report of high-speed optical fiber coating where the high strength and low loss of the fiber were preserved. Subsequently, Paek first demonstrated single-valued strength of perfect silica fiber. He also analyzed the transmission characteristics of optical fiber using numerical techniques (w/Peterson, Carnevale) leading to the first designs (see patents) of dispersion-shifted single-mode fibers, and two best paper awards for physical sciences and devices by the Bell System Technical Journal. Paek has involved in fabrication of a polarization maintaining single-mode fiber that is designed to be used in the soliton applications, such as soliton optical switches, optical logic gates, etc. For a device applications, a prechirper was made to relax timing restrictions for soliton dragging logic gates. In addition, Paek first developed determination of the viscosity of high silica glasses using fiber drawing system, involving in the fabrication of a polarization maintaining erbium-doped fiber amplifier.
References
1. Collected Works of Prof. Un-Chul Paek, 1995. 12, GIST
2. Collected Works of Prof. Un-Chul Paek, 2004. 12, G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