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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적 측면에서 본 독일 통일의 교훈
(광주매일신문 기고)
양봉렬 광주과학기술원 대외부총장
우리의 6월에는 유난히도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한국전쟁, 6·10항쟁 등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일들 이외에도 분단의 큰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바로 6·15 남북 공동선언이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6·15 남북 공동선언 12주년을 맞아 독일 통일의 교훈을 되새겨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필자는 직업 외교관출신으로서 특히 외교적 측면에서의 독일통일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9년 10월에 집권한 브란트 서독 수상은 ‘화해를 통한 변화’를 기치로 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의 변화를 추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동서독관계에서의 변화이고, 둘째는 당시 서독의 국제관계에서의 변화이었다. 동독과 외교관계를 가진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원칙을 폐기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서독이 동방정책으로 추진한 국제관계에서의 새로운 변화의 하이라이트는 1975년 헬싱키 조약체결을 주도하여 소련과 서구진영간의 데탕트를 실현시킨 것이었다. 헬싱키조약은 동서간 데탕트를 연 최초의 협정이었다. 헬싱키 조약에는 당시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서구 자유진영국가와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구 공산권 국가 등 무려 35개국이 서명하였다.
당초 미국 등 서방진영은 이 조약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서독은 소련을 비록한 동구권과 화해할 절호의 기회라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서독의 이러한 집념어린 설득의 결과 서방국가들이 헬싱키조약에 참가하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동서진영 사이의 데탕트가 없었다면 또한 유렵통합 노력을 통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 주요국들 간 신뢰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독일 통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 통일 당시 서독정부는 미국과 찰떡궁합이었다. 미국은 독일 통일에 반대하던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까지 나서서 직접 설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이 끝까지 반대했던 독일의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잔류를 관철시켜 독일을 유럽의 군사협력체제하에 묶어 두었다. 비록 독일이 철저히 과거를 반성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견고히 하고 있었으나, 독일의 독자적인 재무장으로 다시 유럽의 안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국제법적으로 볼 때 독일 통일은 동서독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사이에 맺어진 2+4 협정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서독은 통일을 하고 이를 나머지 국가가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외교적 측면에서 독일의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한미동맹관계를 기반으로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체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당시 부시미국정부가 독일통일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소련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를 설득하게 된 것은 서독과의 튼튼한 신뢰와 공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둘째,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과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주변 강대국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미국과 서독이 끈질긴 노력을 한 바와 같이 우리의 통일과정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의 협조가 불가피한 실정인 만큼 이들 국가들이 우리의 통일을 지지할 수 있도록 하는 국제정치적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데 진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 독일 통일이 국제법적으로 2+4 방식으로 완결된 바와 같이 우리경우 남북한, 미국, 중국이 협정을 맺고, 이를 유엔안보리가 공식 추인하는 2+2+UN방안을 고려할 수 있는 만큼 이를 감안한 외교적 대비를 해 나가야 하겠다.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독일 통일은 유럽통합 과정의 일부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우리 경우도 우리의 통일노력이 동아시아 통합 등과 같은 지역통합움직임과 병행된다면 중국, 일본 등 강대국들을 설득하는데 좀 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