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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특훈교수, 중앙일보 "소프트파워" 기고 - <생큐, 첼리비다케!>

  • 이석호
  • 등록일 : 2013.04.29
  • 조회수 : 1917

생큐, 첼리비다케!

 

정진홍 특훈교수

 

 

  # 얼마 전 낙상 사고로 얼굴에 난 상처를 애써 가리고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들어가 앉았다.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이 아니었다면 굳이 그런 얼굴로 사람 많은 곳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가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날은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에 이어 교향곡 4번과 7번이 연주된 말 그대로 ‘베토벤 데이’였다. 특히 자주 연주되지 않아 오케스트라 현장음으로 직접 듣기가 여간해선 쉽지 않은 베토벤 교향곡 4번을 아주 몰입해서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웬일인지 나도 모르게 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분명히 일종의 ‘치유’였다. 정녕 베토벤의 음악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정말이지 깊이 파인 상처에서 새 살이 돋는 것만 같았다.

 

  # 이날 콘서트홀의 포디엄 위에 오른 지휘자는 우리에게 친숙한 로린 마젤이었지만 정작 나는 연주 내내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거기 서 있다는 ‘묘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첼리비다케는 1979년부터 타계했던 96년까지 17년 동안 줄곧 뮌헨필의 상임지휘자였다. 그는 생전에 완벽주의를 지향하며 참으로 혹독하리만큼 뮌헨필을 조율해온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사후 17년이 경과한 지금까지 제임스 레바인과 크리스티안 텔레만에 이어 로린 마젤에 이르기까지 상임지휘자가 세 차례나 바뀌었지만 그래도 ‘뮌헨필’ 하면 떠올려지는 이는 역시 첼리비다케다. 뮌헨필의 입장에선 첼리비다케와 함께한 17년이 레바인과 텔레만, 그리고 로린 마젤까지 합세한 17년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실제로 뮌헨필 공연에서는 여전히 첼리비다케의 여운과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다. 그래서 정작 포디엄 위에 서 있는 이는 로린 마젤이었지만 내게 느껴지는 것은 세르주 첼리비다케였던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더욱 베토벤 음악을 통한 치유효과를 내게 고스란히 선물해 준 이 역시 첼리비다케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정말이지 “생큐, 첼리비다케!”였다.

 

  # 첼리비다케는 당대에 클래식 황제로 불리던 카라얀을 우습게 여긴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카라얀이 레코딩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음악을 녹음실 안에서 이리저리 ‘땜빵’해서 통조림처럼 만들어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패스트푸드처럼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대신 평생 ‘지금 이 순간’의 음만을 마치 깊은 장맛의 그것처럼 맛보고 느끼며 펼치는 것이 진짜 음악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단 한 번의 음악을 그 순간에 완성하기 위해 혹독하리만큼 철저하게 오케스트라를 훈련시켰다. 그는 모든 음악은 그 현장에서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억지로 붙잡아서 다른 곳에 옮겨놔 봐야 진짜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런 첼리비다케의 독특한 음악철학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전에 일절 상업적인 레코딩을 불허했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첼리비다케의 음반은 그의 사후에 그의 전설 같은 공연을 다시 듣고자 하는 요구 때문에 해적판 음반이 대거 출몰하자 유족들이 이럴 바에야 제대로 된 공식 음반을 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당시 기록용으로 남아 있던 녹음·녹화물들을 철저하게 검토해 세상에 내놓은 것들이다.

 

  # 지금 이 순간, 첼리비다케의 1986년 뮌헨필 실황음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아주 느리고 장중한 음의 선율이 첼리비다케의 헝클어진 백발과 오버랩되며 내게 습입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글도 음악도 삶도 모두 이 찰나 속에서 융합한다. 그 융합의 찰나 같은 순간은 절실하고 소중하다. 거기에 몰입하고 그것에 몰두하며 처절하리만큼 몸부림치면서 이 순간을 진하게 살아낼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점핑이 없다. 문화는 철저히 온축(蘊蓄)이다. 순간의 진정성을 한켜 한켜 쌓아가는 정직한 것이라야 숨이 붙어 있는 살아 있는 문화다. 그리고 그 정직한 문화의 온축 위에서만 진정한 문화 융성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2013.4.27.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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