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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특훈교수, 중앙일보 "소프트파워" 기고 - <가족이 가장 아프다>

  • 이석호
  • 등록일 : 2013.05.06
  • 조회수 : 2000

가족이 가장 아프다

 

정진홍 특훈교수

 

 

  # 지난 일요일 오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소포클레스 원작의 연극 ‘안티고네’를 봤다. 100분여의 연극이 끝난 후 연출가 한태숙 선생과 인사를 나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잘 봤습니다”라는 말만 건네기엔 연극이 던진 무게감과 삶을 압박하는 밀도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분장실로 내려가 늙은 예언자 티레시아스로 열연한 박정자 선생과 크레온 왕으로 극을 주도한 신구 선생께 인사를 드리며 비로소 말할 수 있었다. “객석에 앉아 있은 100분여 동안 정말이지 지옥의 밑바닥까지 갔다 온 심경이었노라”고! 그만큼 처절하게 인간본성과 관계의 악마성에 다가선 연극도 근래엔 보기 드물었다.

 

  # 그리스 비극이 수천 년 동안 반복해서 무대에 올려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의 속살과 그 원형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특히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왕’과 더불어 가족사가 모든 비극의 원천임을 암시한다. 가장 가까운 이가 가장 큰 원수가 되고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혹독한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마치 공식처럼 되풀이하는 게 이들 그리스 비극의 원형질이다. 개개인이 착하고 착하지 않고의 본성적 문제는 사라지고 오로지 관계의 악마성이 빚어낸 얽힌 실타래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또 죽는다. 마치 그것은 늙은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크레온 왕에게 던진 말 속에서 나타나듯 ‘신이 파놓은 함정’에 다름 아니다.

 

  # 어쩌면 우리가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도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리라. 그러니 그토록 사랑해 죽고 못산다며 결혼한 이들이 원수보다 더한 처지가 되어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아이들에게마저 깊은 상흔을 남긴 채 갈라서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미치도록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도 언젠가 내게 그 사랑의 영수증이 청구될 것임을 알아야 마땅하지만 어디 인생살이가 그렇게 명민하던가. “사랑에 빠지다(fall in love)”라는 말이 기실 “함정에 빠지다”와 같은 의미라는 것은 혹독하게 겪어본 후에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 비단 남남이 만나 사랑해서 이루는 부부의 관계만이 아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안티고네가 산 채로 아귀처럼 갈라진 땅 속에 파묻히자 그녀의 약혼자 하이몬은 그렇게 만든 아버지 크레온을 저주하며 땅바닥에 창을 꽂고 그 위에 자기 몸을 찔러 죽는다. 크레온은 자신의 모든 것이라 여겼던 아들 하이몬이 자기 앞에서 “악행으로 나를 기른 비정한 아비여, 나의 죽음이 당신에게 가장 큰 복수가 되게 하리라”며 절규하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뜬 채 목도해야만 했다. 정말이지 그것은 아비를 향한 아들의 가장 처절한 복수요, 저주였다.

 

  # 오월을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가정은 사랑의 온실이고 화목의 그루터기라지만 정작 현실의 가정은 점점 더 불화의 근원이고 비극의 발원지다. 그래서일까? 가정에서 힘을 얻고 가정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되려 가정에서 상처입고 가정에서 멍든다. 그래서 가족이 가장 아프다. 물론 요즘 들어 그런 것만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 이래로 면면히 그래왔던 것 같다. 다만 예전에는 한쪽이 죽어지내는 바람에 화목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젠 아내 이기는 남편 없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진 지 오래고 자식들의 고집이 거세진 지 오래다. 더 이상 남편과 아빠들의 있지도 않은 리더십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어렵게 돼 버렸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을 모르지 않지만 정작 가정이 화목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제가’가 아닐까 싶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정말이지 ‘제가(齊家)의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하기엔 가장의 존재가 너무나 초라해졌고 유명무실해졌다. 이제는 ‘가화(家和)의 앙상블’을 위해 가족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명색이 가정의 달인 오월이 여느 달보다는 덜 싸우고 덜 아플 수 있도록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2013.05.0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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