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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책갈피
# 지난 1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도서상품권으로 몇 권의 책을 직접 구입했다. 사실 대통령이 책을 사보는 것이 신기할 것도 없다. 오히려 그것이 뉴스가 된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현직 대통령이 도서전에 직접 찾아온 것이 14년 만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978년 당시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도 도서전을 찾았다. 그때 당시의 사진까지 나란히 신문지상에 실릴 만큼 대통령의 도서전 나들이는 그 자체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조차 부산하게 요란 떠는 것 아닌가 싶어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씁쓸함이 남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솔직히 문화융성을 주창하는 나라에서 책 사는 모습의 대통령 사진이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클로즈업되는 것이 왠지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문화는 습관이다. 책 읽는 습관, 책 사는 습관이 곧 문화다. 곳곳에서 다소 거창하고 딱딱하게 ‘문화융성’을 이야기하지만 융성보다 더 중요한 게 이런 사소한 습관의 지속이다. 실제로 책 읽는 습관, 책 사는 습관의 지속이 없으면 문화는 융성은커녕 존립도 어렵다. 문화는 단번에 솟아나는 것도 단박에 점핑하는 것도 아니다. 한 켜 한 켜 쌓이는 온축(蘊蓄)이요, 날마다 지속하는 습관(習慣)의 산물이다. 그것이 일상 속에 뿌리내릴 때 문화는 힘을 갖고 융성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 최근 들어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간혹 읽기도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진 않다. 그래도 책장 넘기는 느낌과 여백에 연필로 끄적거리는 여유와 넘겨진 책장의 두께를 손으로 만져보며 내심 뿌듯해하는 담백하고 소박한 마음에 끌려 여전히 종이책을 즐겨 본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엔 동네책방에서 책을 사면 책방주인이 으레 새로 산 책 사이에 책갈피 하나를 끼워주곤 했다. 책갈피는 조금 빳빳한 종이로 만든 것도 있었고 그것을 코팅 처리해서 좀 더 딱딱하게 만든 책갈피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책갈피를 별로 좋아하지도 별반 사용하지도 않았다. 대신 읽던 책 사이에 연필을 꽂아 놓거나 딱히 표시가 필요하면 책 귀퉁이를 세모 모양으로 접는 것으로 책갈피를 대신하곤 했다.
# 얼마 전이었다. 책 정리를 하던 중에 무심코 펼쳐 든 책장 사이에서 여러 해 묵은 나뭇잎 하나를 발견됐다. 아기 손 같은 모양의 단풍잎이었는데 책장 사이에 밀착돼 양쪽 종이면에 나뭇잎 자국을 뚜렷하게 남겨 놓았다. 언제 그 나뭇잎을 책 사이에 꽂아둔 것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내게 뜻 모를 상념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다가 무심코 집어 든 낙엽을 책 사이에 끼워 놓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을 끼워둔 책의 그 부분이 특별히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나뭇잎 하나가 고이 접어들었던 페이지를 펼치면 나뭇잎의 윤곽이 종이에 배어 있는 것처럼 내 인생의 한 페이지도 그 나뭇잎 책갈피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아련한 추억과 상념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겠나.
# 우리 인생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권의 책이다. 그리고 저마다 그 인생의 책장 사이사이에 책갈피도 끼워져 있으리라. 그런 인생의 책갈피에는 아픔도 있고 기쁨도 있다. 서운함도 있고 감사함도 있다. 냉정함도 있으며 뜨거운 열정의 흔적도 있으리! 인생의 책갈피는 대개 그런 것들이다. 책 읽는 진도가 나아가지 못하면 책갈피는 책 속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듯이 인생도 어느 대목에선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그 아픔의 순간에서, 혹은 기쁨의 도취에서, 또는 서운함의 가슴앓이와 냉정함의 배신감을 경험한 순간에서 저마다 자기 인생의 책 한 귀퉁이를 접은 채 멈춰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영영 접어놓을 마음의 책갈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삶은 지속해야 하고 인생은 나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오래 접은 마음의 책갈피일랑 새로운 삶의 도정에서 툭툭 털어 새로 펼쳐놓는 것도 좋지 않겠나 싶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2013년 6월 22일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