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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의 힘
# 서울의 8월은 푹푹 찌는 찜통 그 자체였는데 얄궂게도 8월의 에든버러는 선선하다 못해 쌀쌀하기까지 했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이자 문화중심이고 지금도 잉글랜드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색깔의 문화와 전통을 가졌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곳이다. 에든버러성과 어우러진 고색창연한 외연만이 볼거리가 아니다. 매년 8월이면 어김없이 펼쳐지는 축제의 난장(亂場) 덕분에 여전히 상주인구는 40여만 명에 불과한 이곳이 전 세계의 자유분방한 문화예술인들의 성지로 탈바꿈해 축제기간을 포함해 연간 1200만여 명을 끌어들이는 문화의 블랙홀이 된다.
# 에든버러에서 펼쳐지는 축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양대산맥 같은 것이 인터내셔널 페스티벌과 프린지 페스티벌이다. 프린지는 1947년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됐을 때 공식 초청을 받지 못해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게 된 8개 공연단체가 에든버러 주변부에서 소규모 공연을 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돼 프린지가 에든버러의 중심을 차지하고 인터내셔널은 되레 시들해져 버린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 문화는 움직이는 것이고 문화의 힘은 항상 주변이 중심을 공략하는 데 있는 것 아닌가!
# 에든버러를 걸으며 순간순간 떠오른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조앤 롤링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앰네스티에서 인턴으로 일한 후 포르투갈로 가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그때 포르투갈의 방송기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채 1년도 안 돼 헤어지고 말았다. 결국 싱글맘의 처지로 영국으로 돌아온 조앤 롤링은 살 길이 막연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어린 딸을 두고 혼자 갈 수 없어 정말이지 죽지 못해 살았다. 아이에게 읽어줄 동화책 하나 사줄 수 없는 형편이었던 조앤 롤링은 자기 딸에게라도 읽어주리라 마음먹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어느 출판사에서도 무명 싱글맘의 긁적거린 것 같은 글을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책은 기적처럼 출간됐고 세상에 다시 없는 책의 전설이 됐다. 그 놀라운 책이 이 회색빛 에든버러의 어느 초라한 카페 한 귀퉁이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나를 흥분시킨다. 프린지 페스티벌의 소음을 뚫고 에든버러의 거리를 걸으며 나는 그녀를 만나고 있었다. 모든 창작은 고난을 거름 삼는다는 믿음을 새삼 되새기면서. 그런 그녀 역시 가장 변두리에서 스스로를 일으킨 장본인 아닌가!
# 에든버러 어딜 가나 갤러리가 있고 뮤지엄이 있으며 도서관도 여럿 있다. 흥청거리는 에든버러의 진정한 문화적 힘은 거리 곳곳에 기본으로 깔려 있는 이런 갤러리, 뮤지엄, 도서관들의 존재다. 특히 에든버러 센트럴 라이브러리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강철왕 카네기가 전 세계에 세운 3000여 개의 공립 도서관 중 하나다. 이곳의 도서관은 단지 책 읽는 곳이 아니라 예술적 전시가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의 중심 그 자체다. 도서관 열람실도 들어가 봤다. 역시 개가식의 서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고색창연한 도서관에서 자유분방한 포즈로 책 읽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 아무리 축제의 도시라고 해도 가장 기본적인 문화적·예술적 바탕으로서의 도서관, 갤러리, 뮤지엄이 없다면 축제는 헛되고 헛된 부질없는 몸짓의 난장일 뿐이다. 하지만 갤러리, 뮤지엄, 도서관 등이 그물망처럼 깔려 있는 가운데 펼쳐지는 축제의 난장은 새로운 문화의 얼개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축제도 이것을 배워야 한다. 무조건 난장만 깐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바탕을 깔아야 한다. 그것이 갤러리고 뮤지엄이며 도서관이다. 튼실한 바탕과 뿌리 없이 굵직한 줄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축제의 도시 에든버러의 진짜 힘이 어디서 발원하는지 보고 느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