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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매혹
# 여전히 무더위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름의 절정도 지나가고 있다. 더불어 이 잔혹한 여름의 어느 한편엔 추억이란 이름처럼 이미 아련해진 기억들과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 휴식의 꿈들이 파편처럼 흩날리고 있으리라. 대개 둘이 여행하면 사소한 일이나 감정의 뒤틀림으로 다툰다. 그래서 심지어 돌아올 때는 각자 돌아오기도 한다. 셋이 만나서 가면 둘이 편을 이뤄 남은 한 사람을 왕따시키기 십상이다. 둘이 한 사람 바보 만드는 일은 언제나 쉽고 흔하다. 결국 혼자 여행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다 생각하겠지만 정작 해보면 힘들고 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둘, 셋이 모여 복닥거리며 함께 길을 떠나곤 한다. 물론 그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거의 예외 없이 반복되겠지만!
# 이처럼 누군가와 동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럴 때 묘하게도 동행하는 이들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반목과 갈등을 풀어주고 서로를 다시 이어주고 묶어줘 끝내는 감싸고 얼싸안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서로의 아픔과 상처다. 어쩌면 진정으로 동행한다는 것은 그 아픔과 상처를 나눈다는 것이리라. 일상을 떠나면 대개 심리적으로 무장해제된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물론 거기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도 적잖다. 심지어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상처마저 자신도 모르게 털어놓는다. 그것도 때론 술 한잔 걸치지 않은 맨정신으로 말이다. 애써 그것을 감추지 않고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 거기에 숨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알베르 카뮈는 여행을 가리켜 ‘두려움의 매혹’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 나름 자기 인생을 살아내는 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아픔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이 잔혹한 더위에도 녹지 않을 만큼 심중 깊숙이 얼음처럼 박혀 있다. 그래서 그것을 녹이려면 남다른 체온이 필요하다. 때로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체온으로는 녹일 수 없기에 다른 누군가의 온기가 절실한 것이리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쓰쿠루도 그랬다. 그는 순례를 통해 새삼 ‘상처가 곧 소통의 바탕’임을 깨닫는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 그렇다. 우리를 연결시키는 것은 서로의 상처와 아픔이다. 상처 없는 인간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품어낼 수 없다. 아픔 없는 사람이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삶은 기쁨만으로 충일한 것일 수 없다. 우리의 생은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기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프다. 하지만 이열치열(以熱治熱)하고 이독제독(以毒制毒)하듯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또 다른 이의 상처요, 아픔을 극복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누군가의 아픔이다. 단지 “그도 알고 보면 나 못지않게 힘들었어”라는 피상적인 위안만이 아니다. 진짜 아파 봤기 때문에 진정으로 보듬을 수 있는 것이다. 상대를 보듬고 품어내는 진정한 포옹은 바로 그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는 것이다.
# “자신이 ‘그 사람’이 아니며 ‘그 사람’이 될 수 없는 한 아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라 하더라도 단지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데 불과할 뿐이다.” 나의 고백록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인간은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다가서기 위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감추지 않는 것이리라. 그것이 서로를 소통시킬 바탕이 되어줄 터이니! 그 아픔과 상처를 조금씩 나누는 가운데 세상은 조금은 더 살 만한, 아니 조금은 더 숨쉴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지 않겠는가. 이 잔혹한 무더위 속에서조차!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중앙일보 2013년 8월 17일자)